부부의 연

캐나다에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너무나 흔한 것이 바로 싱글맘이다. 2015년 처음 엘더그로브에 정착하면서 스트롱 스타트 교실에서 알게된 니콜도 역시 싱글맘! 두 남매를 홀로 키우고 있는 니콜의 삶은 평범하지 않는 마치 드라마속 이야기처럼 늘 새로운 이야기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헤어진 남편과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는데다가 남편이 2주에 한번 주말에만 남매를 데리고 가서 지내는 상황인데, 얼마전 새로운 여자친구가 전남편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전남편이 그동안 아이들이 어릴때는 니콜에게 전액 양육비를 주면서 보모처럼 대하다가, 남매가 초등학생 2,3 학년으로 다 컸다고 생각하고 손이 덜간다고 판단해서 올해부터는 그 양육비가 아깝다고 아이를 반반씩 돌보자고 해서 법정싸움이 시작되었다.

친구 니콜은 연년생 두 남매를 키우면서 독박육아를 하다가 전남편에게 뒷통수를 맞고는 법적으로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들에게 법적인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친구 니콜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교회 목사님, 스트롱 스타트 선생님, 그리고 몇몇 친구들이 편지를 작성했다.

법정에 제출할 편지를 작성하면서, 지난 2015년부터 올해까지의 친구 니콜의 생활을 뒤돌아보니 지금 나와 함께 10년을 살고 있는 남편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부부는 절대로 완벽할 수 없고, 완전한 반대의 두 인간이 만나서 공동 운명체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인생의 파도를 함께 헤쳐가는 인생의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책임감 없는 남자를 만나서 이혼하고 양육권 분쟁을 시달리고 또 다시 아이들에게 평생의 상처를 주어야 하는 친구 니콜을 보면 너무나 씩씩한 친구의 모습에서 존경심마저 든다.

남자는 거기서 거기고,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있지만 너무나 사랑한 남자에게 실수로 이혼하자고 한 말 한마디로 진짜 이혼을 한 니콜의 경우를 보면 친정엄마가 늘 말씀 하시던 이혼이라는 단어는 절대 꺼내서도 안되고 상상해서도 안된다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동안 헤어진 전남편과의 희망을 안고 살던 친구 니콜은 일년동안 학교 보조 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홀로설 힘을 키워나가고 있다.

2019년 우리 부부는 결혼 1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이다. 한국에서 만나 캐나다에서 자리잡기 까지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을 돌아보면 서로 잘 참고 견뎠다고 서로를 다독이게 된다. 국가와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부부의 연을 이어나가려는 서로의 노력만이 행복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가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12월 이야기

캐나다에서의 12월은 가족을 위한 시간이다.

크리스마스가 가장 중요한 일년중 가장 큰 명절이라 캐나다 BC 지역에 가족이 없는 나에게는 그저 그런 휴식같은 시즌!

12월 첫번째 일요일에 크리스마스를 장식하고 완벽한 주말을 보낸 다음날, 동부 끝 뉴펀들랜드 시댁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시아버지와 같은 유전질환으로 고생하던 남편의 누나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모든 일정을 중단하고 우리는 시댁으로 날아간다.

삶과 죽음앞에서 우리는 운명에 순응하는 작은 인간일 뿐이고 인생의 그 순환을 가족이 함께 해야한다고 지난 여름 누나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이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우리에게 이 순간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가족을 잃은 슬픔, 하지만 고통속에서 일년동안 투병하는 모습을 지켜본 가족들 입장에서는 고통없이 같은 병명으로 10년전 돌아가신 시아버지 곁으로 갔다는 축복의 의미가 더 깊은 듯 하다.

12월 멕시코, 뉴욕, 벤쿠버 각지에 흩어져있던 가족들이 누나 덕분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항상 착하고 긍정적인 시누이가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선물한 진정한 크리스마스 선물같은 시간을 우리가 받은 것 같다

 

Grade 4 Social Study

한국에서 문과를 나온 엄마는 수학 때문에 인생이 힘들었다면 캐나다에서 이과를 나온 남편은 암기과목 때문에 불행했다는 너무 다른 각 나라의 교육 흑역사를 가지고 있다.

숙제가 따로 없는 캐나다 초등학교에서 조금씩 반항의 기운이 올라오는 프리틴 초등학교 4학년 큰아들은 이과출신 아빠를 닮아 사회과목을 가장 싫어한다.

매일 아이들 학교 하교시간이면 세남매 엄마는 저절로 긴장을 하게 된다. 그날 문제가 있었다면 담임 선생님께서 눈짓으로 손짓으로 엄마와의 면담을 요청하시는데 수요일 오후 하교시간!

큰아들 담임 선생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셨다.

일단 큰아들이 부담스러워 하길래 집 열쇠를 건네주고 집에 먼저 가있으라고 했다.

Social Study 수업 중에 반항을 한 큰아들에게 숙제로 보냈다고 교제와 함께 참고하시라는 말씀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큰아들과 대화 후,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숙제를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한국에서 영어교육을 했던 남편은 캐나다에서 그렇게 싫어하던 사회공부를 30살 넘어 한국에서 중고등학생 영어를 가르치면서 노하우를 배웠다며 큰아들 사회숙제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재빨리 엄마는 인증샷을 찍어서 담임 선생님께 이메일을 보내드렸다. 곧바로 답장이 온걸 보니 담임 선생님께서도 걱정하고 계셨다고 학교와 가정에서아이를 위한 팀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감사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8년 영어교육 경험이 남편에게 지금의 세남매 교육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같은 엄마의 마음으로, 같은 교육자의 마음으로 공동교육의 또다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Report Card

9월학기에 시작된 캐나다 초등학교는 정식 성적표를 보내주기 전에 임시 성적표를 집으로 보내준다.

한국에서 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점수와 등수에 치여살던 나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면 캐나다의 초등학교는 성적표 어디를 찾아봐도 등수 또는 점수같은 숫자를 찾아볼 수 없다.

선생님이 직접 체크하신 성적표에는 너무나 이상적일 수 있는 항목들만 나열되어 있다.

수업시간에 얼마나 시간관리를 잘 했는지, 재시간에 과제는 마무리 했는지, 혼자서 마무리를 잘 했는지 정도만 수업관련 부분이다.

수업적인 부분 이전에 더 중요하게 체크되는 부분은 얼마나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남들을 존중하는지 인성과 관련되는 부분이 더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캐나다 초등학교 성적표에서 가장 큰 다른점은 학생 본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학업 성취도를 본인 스스로 체크하는 항목이다.

초등학교 두 아들은 얼마나 솔직한지 각 항목에 대해서 너무나 진실된 v 체크를 해서 엄마 아빠가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캐나다 초등학교 성적표는 아이들이 무서워서 성적표를 감추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국에서 교육받은 나에게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개인의 의견을 묻는 사회가 아니었고 형식적으로 의견를 묻는 순간에도 솔직한 내 의견을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고등학교 2학년때, 학급 실장이었던 나는 학교 전체적으로 “야간 자율학습 찬반” 의견을 묻는 설문을 했는데 우리반은 솔직하게 반대의견 설문지가 더 많이 나왔다고 폭력 담임 선생님에게 아주 크게 혼이 났고 결국 학교에서 원하는 건 “야간 자율학습”이었고 그 의견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담임 선생님과 실장인 나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남들과 다른 의견을 내면 그 다른 의견을 낸 사람이 이상하게 몰리는 한국 사회에서 당연히 개인의 의견은 없던 세상에서 캐나다 초등학교의 성적표는 참 신선한 제도다.

캐나다 초등학교는 반친구와의 경쟁보다 반친구를 존경하는 인성을 가르치고 캐나다 어린이들은 남을 시기 질투하는 마음보다 모두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사는 다양성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현장이다.

 

 

 

Follow your heart!

나이가 마흔을 넘으면 가슴 뛰는 일보다는 마음 조리며 한 고비 한 고비를 넘기는 순간이 더 많아진다.

한국에서 80년대 공교육을 받으면서 선생님에게 착한 학생이 최고라고 생각하다가 중학교부터 선생님이 하지말라고 하는 짓들만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반항의 정점을 찍으며 폭력 담임 교사와 의리의 반장이라는 내 인생 최고의 학원 폭력 드라마를 직접 경험하고 정신차리고 공부를 시작해서 대학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사회의 부조리가 내 심장을 나대게 했다.

대학교 2학년 휴학하고, 머리를 짧게 숏커트 하고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열정의 나라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방문하고 그때 처음으로 탱고라는 음악과 춤에 빠져들었다.

1997년 이후, 스페인에서 느꼈던 가슴 뛰는 열정을 2018년 줌바를 만나면서 다시 잠자던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일주일에 두번 줌바 수업을 들어보면, 한시간동안 쉼없이 움직이는 운동에서 내가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1997년 스페인에서 느꼈던 바로 그 느낌과 흡사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광장에서 이십대 젊은 한국 배낭여행객들과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걷던 그날 밤!

지금처럼 인스타그램 이나 페이스북이 없던 시절이라 그때의 추억이 남아있는 사진한장 없지만, 그날밤 이름모를 한국 젊은이들과 다함께 애국가를 부르던 가슴뛰는 순간의 감격을 줌바 수업을 하면서 다시 느끼기 시작했다.

줌바 강사 수업이 미국과 캐나다 전 지역에서 자주 있는데 다음달 동네 근처에서 오전 11시부터 저녁 8시반까지 토요일 하루 투자해야해서 정말 망설이다가 내 심장을 따르기로 했다.

줌바로 마흔 넘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기를!

 

미스터 션샤인 – 지금의 대한민국에게 남긴 미션

유명 작가와 유명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그저그런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한 이 드라마는 그 어떤 역사 드라마나 영화가 보여줄 수 없는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고 끝이 났다.

특히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대한민국을 제3자의 입장으로 지켜보아야 하는 지금의 내 정체성을 다시한번 강하게 확인시켜주는 울림이 있는 이 드라마를 떠나 보내기 힘든 마음으로 마지막회를 시청했다.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역사책 속 이야기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HISTORY가 이렇게 위대한 대한민국의 이야기라는 사실에 다시한번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반일감정이라는 작은 불씨는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역사를 더 알게 되면서 강해지는 애국심에 횟불이 되는 것처럼 점점 더 커져가는 마흔 넘은 한국 아줌마에게 [미스터 션샤인] 은 드라마가 아닌 하나의 역사 교과서같이 느껴진다.

K-POP이 전세계에 울려퍼지는 요즘 [미스터 션샤인] 도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늦었지만일본의 잔혹함을 지금이라도 알렸으면 좋겠다.

아무개라고 불리는 의병들이 지켜낸 대한민국과 태극기의 의미를 가슴깊이 새겨준 아름다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남긴 미션은 항상 매일이 두렵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이기를 바란다.

 

 

가을의 시작

캐나다에도 절기라는 것이 있다.

First day of Autumn!

2018년 9월 22일 토요일 가을이 되는 날!

캐나다 유치원에 입학한 막내딸은 3주가 지나고 첫번째 감기에 걸렸다.

2013년 11월 생인 막내딸은 캐나다 나이로 아직 5세가 안되었으니 8시반부터 2시반까지 하는 풀타임 수업이 피곤할만도 하다.

9월 새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만큼 엄마도 긴장을 하는데 목요일 오픈 하우스를 통해 새학년 담임 선생님들과 인사까지 하고 나니 엄마도 긴장이 풀려버렸다.

막내딸 감기를 핑계로 엄마도 함께 학교 결석하고 비오는 금요일 집에서 쉬었다.

저녁으로는 감기에 걸리거나 아프면 먹는다고 하는 서양식 치킨수프와 한국식으로 얼큰하게 김치까지 넣어서 닭고기 듬뿍 넣어 세남매는 몸보신을 했다.

40년 동안 한국 스타일로 산 한국 엄마에게는 캐나다의 추위가 여전히 으스스하고 캐나다의 가을은 낭만보다는 가을 우기 때문에 우울해지는 기분이다.

건강한 막내딸이 감기에 걸릴 정도면 지금 초등학교 전체적으로 감기 바이러스가 돌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김치를 좀더 먹어서 김치 파워로 이번 겨울 이겨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생긴다.

일년에 한번 겪어야만 하는 감기와의 전쟁은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 살때는 캐네디언 남편이 크게 아팠고, 캐나다로 대륙을 이동하니 한국인 아내가 크게 감기와 싸우게 된다.

이렇게 손님처럼 일년에 한번 찾아오는 감기 손님이라면 기꺼이 반갑게 맞아주리다.

내가 대신 아플테니 우리 가족들만 건들지 말고 조용하게 떠나주기를!

 

Boundary Bay Regional Park

캐나다 BC 델타 지역

Boundary Bay Regional Park

막연하게 바다가 보고 싶은 날!

랭리지역 엘더그로브 집에서 40분 정도 달려가면 델타지역 트와센몰 지역을 지나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비싼 주택가들을 구경하면서 보이는 드넓은 초원과 함께 나타나는 풍경.

너무나 복잡한 관광지 화이트락과 달리 주차장도 무료이고 깨끗한 화장실과 작은 카페까지 준비되어 있어서 데이트 하기에 좋은 장소.

공중 화장실에 가족 화장실까지 너무 개끗하게 준비되어 있고 바로 앞에 커다란 어린이 놀이터가 있으니 가족단위 방문객에게 인기있는 공원.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있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갯벌체험을 해 볼 수 있는 신선한 공원인데 물이 너무 드러워서 잡히는 해산물 먹지말라는 안내문까지 있으니 한국 인천 을왕리처럼 해물 칼국수 너무 먹고 싶어지는 분위기.

여름바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복잡한 느낌이 싫다면 겨울에 자전거 가지고 트레일 한번 돌아보고 싶은 다양한 매력의 공원.

 

Chilliwack Lake, BC

캐나다의 여름은 캠핑과 휴가를 위한 시간이다.주말마다 가족단위로 물놀이가 가능한 공원 또는 호수에 모이는데 처음으로 칠리왁 호수에 다녀왔다.

엘더그로브에서 칠리왁 호수까지는 한시간 이상 소요되었는데 주말 점심시간 직전의 고속도로는 뜨겁고 정체가 꽤 심해서 어른도 짜증이 난다.

다들 더위를 피해 모여들어 주차장도 만원이고 아이들은 지쳐있고 바리바리 짐을 들고 해변가로 내려가는 순간 그 모든 짜증은 사라져버린다.

인간에게 힐링하라고 활짝 열어주는 대자연의 넉넉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칠리왁 호수의 풍경!

숨이 멎어버린다는 표현이 너무나 적절한 자연의 모습인데 엄마는 마음껏 그 자연을 감상할 틈이 없다. 배고픈 아이들에게 재빨리 바리바리 가져온 음식들을 펼치고 먹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메뚜기 떼처럼 점심을 먹고 나면 아이들은 물놀이를 시작하고 어른들은 맥주를 마시면서 수다가 시작된다.

대자연이 허락한 최소한의 장소에서 가장 불편한 시설은 화장실인데 캠핑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불편한 화장실 때문이다.

엄마가 좀 앉아 있으면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화장실 가자고 엄마를 귀찮게 한다. 변기 아래가 뻥뚤려있는 화장실이 네살과 여섯살 아이들에게는 너무 불편한 장소라서 엄마는 꾹 참고 아이들을 위해 화장실까지 언덕을 몇번이고 오르락 내리락 했다.

여러 가족과 함께 놀러와서 그나마 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지는 않았는데, 칠리왁 호수에서의 주말은 모두에게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핸드폰 시그널이 터지지 않는 지역이라서 인터넷없이 마음껏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단 하루!

Life is Wonderful!

 

 

캐나다 이주 5 주년

2013년 7월 14일

두아들과 막내딸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남편의 나라인 캐나다에 이사를 아니 정식으로 이주한 우리 가족에게는 역사적인 기념일!

그때까지 내 인생에 남편보다 더 중요했던 엄마&아빠&동생 그리고 친구들과 헤어져서 남편의 고향도 아닌 곳에 자리를 잡는 다는 것은 캐네디언 남편에게도 어려운 시작이었다.

3개월만에 현재 다니고 있는 지역 신문사 프로그래머로 취업하고 회사 근처 지역 베이스먼트에서 세남매를 키우면서 큰아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평소 말 없는 큰아들이 문득 자기는 지하로 내려가기 싫다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아서 큰아들유치원 졸업에 맞춰 이사갈 집을 찾기 시작했다.

2015년 당시, 예산에 맞춰서 랭리와 써리 지역을 매일밤 인터넷으로 검색했는데, 랭리 끝 엘더그로브 초등학교 앞 이 드넓은 잔디밭을 볼 수 있는 지금의 타운하우스 거실에서 처음으로 큰아들이 “이 집이 좋아” 라는 말에 2년만에 캐나다에서 최초의 내집장만을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남편의 고향인 동부 뉴펀들랜드로 돌아가려는 계획이었지만, 엘더그로브에 정착하고 너무 좋은 동네 이웃과 친구들 덕분에 동부로 이사가는 것은 포기하게 되었다.

2015년 여름, 엘더그로브에 정착하고 3년차가 되니 어느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사는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곳은 한국이나 캐나다나 다 똑같고, 독박육아로 괴롭고, 캐나다 시집살이도 한국만큼 드럽고 치사한 경우가 너무 많다는 사실을 직간접으로 체험하고 보니 캐나다 살이도 별반 다르지 않게 익숙해지는 시기인듯 하다.

지난 5년간 나를 버리고 가족을 위해 살았으니 앞으로는 캐나다 사회의 일원으로 내 자리를 찾는 것이 나의 새로운 미션이 될거 같다.

캐나다 이주 10주년이 되었을 때, 당당한 나만의 커리어가 완성되어 있기를 꿈꾸며 이글이 성지글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